부제 : 당구왕 최카피 프롤로그

연말이 되자 몇 곳의 거래처에서 통장으로 입금을 해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큰 자리의 숫자지만 통장은 돈이 스쳐지나가는 창구일뿐 내 것이라는 느낌은 1g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현금이 조금 필요하니 ATM기에서 약간의 현금을 출금하였다.
뻣뻣한 뭉치를 손에 들어 지갑으로 넣을 때 마음 한켠에 남았던 우울도 벗어지는 듯 하다.
오랜만에 번화한 거리를 걸어본다. 강남역 한켠에 있는 ‘iN BUS’라는 카페는 항상 사람들로 부산하다.
유리창 넘어로 보이는 여자 아르바이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물씬하지만 손님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서로 재잘거리는 것에 여념이 없다.
평상시에는 유리창을 통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던 것이 오늘은 그들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사이즈는 뭘로 드릴까요?”
“그냥 보통으로 주세요.”
“4,500원 입니다.”
역시 유리창을 통해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커피를 정말 좋아하지만 한잔에 4,500원은 과한 금액이다.
오래걸리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나는 따뜻한 커피가 나왔다. 그래도 커피를 보자 가격이 비싸다는 생각은 어느새 저만치 멀리 가버렸다.
날이 추워서였을까?
항상 지나치는 카페에 발을 디딘 이유가 스스로도 궁금했다.
따뜻한 커피를 한모금 들이키니 궁금했던 이유도 멀리 사라지고, 어느새 핸드폰을 조물락 거리고 있다.
“여어 최카피.”
“뭐하냐? 형 심심하다.”
“그래? 나도 조만간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의논할 이야기도 있었거든.”
“뭔데?”
“전화로 말하기는 뭐하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려고 했지.”
“오늘은 시간 어렵냐?”
“음… 저녁에 괜찮은데.”
“마침 나도 강남역이야.”
“그래? 웬일이냐.”
“그냥 마실 나왔지. 심심해서.”
“그럼 좀 놀면서 기다려. 이따 밥 사줄께.”
“그래. 끝나고 전화줘.”
우연히 건 전화로 저녁 스케쥴이 잡혔다. 심심해서 나왔는데, 친구 녀석이 저녁까지 사준다고 하니 금상첨화다.
녀석이 퇴근하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어디선가 시간을 때워야 한다.
혼자서는 그리 할 것도 없어 주변에 PC방에 들어가 녀석의 전화를 기다리며, 게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야~ 이제야 끝났다. 어딨냐?”
“여기 5번 출구 쪽에 PC방.”
“역시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조금만 기다려 바로 갈께.”
게임에 열중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어깨를 툭 건드린다. 녀석은 탐정이라도 되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뭐하냐. 나가자.”
게임비를 계산하고, 녀석과 밖으로 향했다.
“뭐 먹을래?”
“난 오랜만에 술 한잔 하고 싶은데, 아까 뭐 할 이야기도 있다며?”
“그렇긴 한데, 술은 내가 먹기가 좋 그렇거든. 음… 아 생각났다.”
녀석은 나를 근처에 PUB으로 데려갔다.
“술을 많이 먹기는 힘들고 가볍게 맥주 한잔 정도, 여기가 음식도 괜찮거든.”
PUB의 모양새는 그냥 모던한 느낌이었다. 강남에서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종업원이 오더니 무척이나 친절하게,
“아~ 오셨어요. 오랜만이시네요.”
“네. 오늘은 친구랑 왔어요. 우선 하이네켄 라거 두병이랑. 벨루테, 라따뚜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가고 나서,
“여기 단골인가보다? 엄청 친절하네.”
“요즘에는 많이 못왔네. 일하는 분들이랑 가끔 오거든.”
“그래 무슨 이야기인데?”
“그냥. 요즘 이야기를 할 상대도 없고, 내 고민이지.”
“니가 무슨 고민이야. 잘 하고 있어.”
“사실은 요즘 결혼 때문에 고민이다.”
“결혼 날짜 잡았어?”
“아니 그런 것은 아닌데, 결혼을 생각하니 세상에 더욱 자신이 없다.”
녀석의 직업은 프로그래머다. 다들 분당이나 가산으로 가는 요즘 아직도 의리를 지킨다고 그리 크지 않은 회사에서 마음이 맞는 분들과 함께 SI로 힘겹게 버티고 있다.
녀석이 힘들다고 말한 것도 벌써 꽤 되었는데, 나이가 차면서 프로그램 짜는 일도 버겁고 매니져로 갈까 고민 중이었다.
나는 그런 고민의 연장선이겠거니 했는데, 조금 더 디테일해진 고민이었다.
“뭐가 걱정이야. 넌 잘해냈고, 앞으로도 잘 할꺼야. 나야 뭐 결혼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이지만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고, 너는 의외로 가정적이니까.”
“의외로는 뭐냐?”
농담 삼아 던진 단어에 딱 걸렸다. 너무 무거운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 싫어 살짝 놀렸더니 덥석 물었다.
“너야 딱 보면 완전 상남자인데, 의외로 제수씨 될 분 잘 챙겨주잖아. 난 도저히 귀찮아서 그렇게는 살기 싫더라.”
녀석의 고민은 내가 보기에는 단순했지만 녀석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요즘 그걸로 정신과도 다니고 있어.”
“그렇게 심각한 문제야?”
내심 깜짝 놀랐다. 정신과라니..
한편으로는 이 각박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정신과를 가지 않는 내가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칠 때,
“이 일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운데,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자신이 없네.”
“음… 간단히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닌것 같은데, 우선 의사는 뭐라는데?”
“우울증이래. 요즘 요거 먹고 있다. 회사에는 비밀인데, 살짝 눈치는 챈 것 같아.”
녀석은 조그맣고 하얀색의 통을 흔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영이에게도 말을 아직 못했거든.”
“그게 중요하냐? 너는 가끔 남을 너무 배려하는 것이 문제야. 가끔은 아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무조건 이기적이어야지.”
그러면 안 되는데, 친한 친구가 멍청해 보이는 모습에 감정이 격앙되어 소리가 높아졌다.
어느새 맥주가 각 5병이 넘어가고 있었다. 녀석은 내일 중요한 작업이라 술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는 말했지만, 이야기가 길어졌다.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호흡이 맞지 않는 PM과의 갈등, 미래를 내다보기 힘든 삶이 녀석이 가진 문제였다.
거기에 제일 중요한 이슈는 결혼.
자기 하나도 미래를 책임지기 어려운 이 시기에 결혼을 해서 타인의 삶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녀석을 정신과까지 가게한 이유였다.
친한 친구지만 녀석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단순히 풀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미안하다. 내가 큰 도움이 못 되어서..”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너의 모습을 보니 뭔가 힘이 난다.”
둘다 혀가 꼬부러졌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잘 이해했다.
“카피야. 근데 오랜만에 우리 당구나 한 게임 치자. 스트레스 좀 날려버리게.”
“뭔 소리야. 난 당구 못쳐.”
“그러지 말고 당구 치러 가자.”
“알았어. 으휴. 그렇게 친구를 이기고 싶다는데… 근데 형이 오늘 돈이 좀 들어왔다. 이거 계산은 내가 할께.”
“헛소리. 내가 만나자고 하고, 내 고민도 들어줬는데, 당연히 내가 내야지. 당구나 열심히 쳐서 이기세요~ 지면 여기 당구비 비싸다.”
고민을 이야기 하고 나자 녀석은 응어리 진 뭔가가 조금은 풀렸는지. 아까보다는 활기가 있어 보였다.
돌아갈 시간도 되었고 당구를 잘 치는 것이 아니라서 당구를 치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로서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줄까 당구장으로 향했다.
옆에서 녀석의 얼굴을 보자 흐믓한 미소를 짖고 있는 모습에 나도 괜히 흐믓해졌다.
평일인데도 당구장에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꽤 큰 당구장인데, 다이가 세개나 비었을까?
여기도 녀석의 단골집인듯 사장님이 꽤나 반갑게 아는 척 했다.
“요즘에 통 안 들르시더니 오랜만 이시네요.”
“아~ 네. 사장님. 친구녀석과 한겜임 치려고요.”
“그럼 사구로 가져다 드릴까요? 삼구로 가져다 드릴까요?”
“사구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이 당구공을 다이에 놓아주고, 직원으로 보이는 친구가 음료수를 가져다 주었다.
당구장은 꽤나 쾌적했다.
“여긴 얼마냐?”
“10분에 3,000원.”
“뭐야? 이런 공치기 10분에 3,000원이나 내라고?”
“그니까 열심히 쳐서 이기라고!.”
“아휴. 내가 앓느니 죽지. 조낸 열심히 칠테니 알아서 해라.”
“내가 바라던 바다.”
나는 물80이다. 사실 이것도 사치 다마이지만 당구에는 영 소질도 없고 재미도 없어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다 당구칠때 옆에서 만화책만 엄청 읽었다.
그러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일하는 직원들과 몇 번 칠 기회가 있었는데, 영 재미가 없었다.
게임에 항상 깍두기로 참가하는 수준이었다.
뭐 그냥 큐대로 공을 건드릴 수 있는 수준에 룰을 아는 정도라서 친구들은 나에게 무척이나 버거운 사구 80점이라는 점수를 부여했다. 쉽게 말하면 그냥 호구인 것이다.
그래서 항상 당구 치자는 말이 나올 것 같으면 다른 장소로 화제를 돌리고는 했다.
녀석은 사구 200점 정도를 치는데, 사실 그것도 사기 다마다. 녀석이 당구 친 시간이 얼마인데, 친구들에게 이기고 싶어 다마수를 낮춘 것이 틀림 없다.
사구는 노란색 공 한개, 흰색 공 한개, 붉은 색 공 두개 이렇게 네개의 공을 가지고 치는 종목이다.
한쪽은 노란색, 한쪽은 흰색 공으로, 자신의 공을 한번 쳐서 붉은 색 공을 모두 치면 10점을 획득한다.
암튼 그렇기 재미없는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공은 나였다.
첫발은 역시나 빗나갔다. 오래만에 치는 당구도 당구지만 술을 한잔 하고 치는 당구는 손과 몸에 중심이 잡히지 않아 쉽지가 않다.
근데 분명 함께 술을 먹었는데, 내가 2개를 치는 동안 녀석은 10개가 넘게 치고 있다.
타임이 10분을 넘어 12분을 향하자 녀석은 자신의 200점을 모두 맞추고 마무리에 들어갔다.
마무리란 사구에서 자신의 점수를 모두 치면 마지막 이벤트로 자신의 공으로 붉은 색 공을 맞추기 전에 다이 옆면에 쿠션을 먼저 맞추는 것이다.
녀석은 마무리도 쉽게 돌파했다. 세번이나 쳤을까? 첫번째 게임이 끝나는 시간은 15분이 조금 넘었다.
두번째 게임도 패자인 내가 선공이었다.
역시나 불발이었다. 녀석을 위안하려다 내가 정신과로 갈 판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녀석이 취기가 조금 돌았는지 나와 비슷하게 맞추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공이 우연히 모아졌다.
한큐에 50점을 득점. 웬지 자신감이 상승했다.
남은 30점을 치기 위해 노력했는데, 아쉽게도 삑사리가 나서 40점으로 점수가 올랐다.
삑사리란 붉은 색 공을 한개도 맞추지 못할 때를 말한다.
녀석도 점점 따라오더니 100점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즉 10번을 맞추면 녀석이 마무리에 들어간다.
우와~
천운인가? 공이 구석에 모였다.
온몸에 신경을 모아 아주 살살 공을 쳤다.
정말 다행이다. 너무 잘 쳤다.
공들이 많이 움직이질 않았다.
두번째도 세번째도 너무 잘 쳤다.
이제 공들이 많이 벌어졌지만 그리 어려운 상태는 아니었다.
내 수구에 아래쪽을 향해 큐를 매우 강하게 쳤다.
공은 매우 빠르게 날아가 붉은 공을 치더니 강력한 회전이 생겼다. 다른 붉은 공으로 다가갔다.
그 때의 쾌감은 뭐라고 말 할 수 없었다.
내가 먼저 마무리에 들어갔다.
마무리에 들어간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지만 마무리는 그리 쉬운 미션이 아니다. 연속해서 계속 마무리를 돌파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느새 녀석은 3개 밖에 남지 않았다.
“아휴 힘들다. 술이 늦게 도네.”
“그러게 힘들어 죽겠다. 근데 여기 음료수 맛있네.”
“음료수가 뭐가 맛있어. 다 똑같지.”
“아냐. 내가 당구장을 자주 안 와서 그런지 당구장 마다 음료수 맛이 달라.”
“그래? 태어나서 처음 듣는다. 깔끔한 넘. 하하.”
기분좋은 대화를 나누자 마자 녀석은 아주 쉽게 마무리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아주 쉽게 마무리까지 쳐버렸다.
허탈했다. 아니 매우 기분이 나뻐졌다.
“고맙다. 친구. 너와의 대결은 항상 즐겁지. 마지막엔 내가 승리하기 때문이지.”
녀석이 말하는 이 대사는 항상 불쾌하다.
이래서 당구를 치기가 싫다.
뭔가 모를 허탈함.
그래도 아픈 친구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 크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라도 웃음을 찾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사실 조금은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니가 즐겁다니 나도 좋다.”
어찌되었든 패자로서 깔끔하게 당구비를 내고, 녀석과 헤어졌다.
어려서는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크면서 서로 삶이 달라지며, 사는 곳도 달라졌다.
돌아오는 버스에 창문을 바라보니 흰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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